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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벌새 포스터

    조용히 마음을 울리는 영화, 벌새

    한 편의 영화가 우리의 일상 속 잊고 있던 감정을 다시 불러일으킬 때, 그 영화는 오랫동안 기억에 남습니다. 김보라 감독의 장편 데뷔작 벌새는 바로 그런 영화입니다. 특별하지 않은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한 소녀의 이야기지만, 그 속에 담긴 감정의 결은 아주 특별합니다. 1990년대 서울을 배경으로, 중학생 은희가 겪는 사소한 듯하지만 인생을 뒤흔드는 순간들을 섬세하게 담아낸 이 작품은, 소리 없이 마음을 두드리며 깊은 울림을 남깁니다. 지금 다시 봐도 전혀 낡지 않고 오히려 더 짙게 다가오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은희라는 이름으로 기억되는 시간

    벌새의 주인공 은희는 중학교 2학년 소녀입니다. 그 나이의 많은 아이들이 그러하듯이, 은희도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질문을 가슴속에 품고 살아갑니다. 가족 안에서도, 학교 안에서도, 심지어 친구와 연인 사이에서도 은희는 늘 어디에도 중심이 아닌 가장자리에 서 있는 존재였습니다.
    가정은 겉으로 보기에는 단란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폭력과 침묵이 강하게 지배합니다. 아버지는 권위적이고 오빠는 은희에게 폭력을 행사하며, 어머니는 그 안에서 무력하게 살아갑니다. 은희는 어디에도 자신을 마음 놓고 드러낼 수 없는 환경 속에서 자라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그녀에게도 한 줄기 빛과도 같은 존재가 등장합니다. 바로 새로 만난 한문 선생님 영지인데요. 영지는 은희에게 처음으로 진심 어린 관심을 보여주는 어른입니다.
    은희는 영지를 통해 처음으로 자신이 누군가에게 의미 있는 존재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봅니다. 그 따뜻한 시선은 은희에게 잊을 수 없는 흔적을 남기며, 삶에 대해 처음으로 깊이 생각하고 자신의 감정을 바라보는 법을 알려줍니다. 이처럼 벌새는 사춘기의 감정선과 정체성 혼란을 극도로 정제된 시선으로 담아낸 성장영화입니다.

    일상의 리듬으로 흐르는 카메라

    벌새는 드라마틱한 사건이나 큰 갈등을 중심으로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잔잔하고 반복되는 일상 속의 작은 변화들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김보라 감독은 대사보다는 시선과 침묵, 공간의 여백을 통해서 감정을 자연스럽게 전달합니다. 카메라는 언제나 은희와 함께 걷고, 멈추고, 고개를 숙입니다. 그 덕분에 관객은 마치 은희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듯한 시선으로 영화를 보게 됩니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1994년은 성수대교 붕괴 사고가 있었던 해입니다. 영화는 이 사건을 주요한 사건으로 삼지 않지만, 배경으로 깔아놓음으로써 사회 전체의 불안정한 분위기와 개인의 감정이 서로 맞물리는 구조를 만들어냅니다. 이는 개인의 감정이 사회와 단절되어 있지 않음을 보여주는 섬세한 장치이기도 합니다.
    영화 벌새는 그래서 더 현실적이고, 우리와 가까운 이야기로 느껴집니다. 누구나 은희처럼 말하지 못했던 감정 하나쯤은 가지고 살아갑니다. 벌새는 그 감정에 조용히 손을 내밉니다. 마치 괜찮다고, 너만 그런 게 아니라고 이야기해 주는 듯한 따뜻한 영화입니다.

    잊을 수 없는 연기, 그리고 음악

    이 영화의 또 다른 큰 힘은 배우들의 연기입니다. 은희 역을 맡은 박지후 배우는 당시 신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감정 몰입을 보여줍니다. 눈빛 하나, 숨소리 하나에 담긴 감정들이 진실하게 다가오고, 말보다 더 많은 것을 전달합니다. 그녀의 얼굴은 이 영화를 끝까지 끌고 가는 중심이며, 관객이 공감하게 만드는 가장 큰 요소입니다.
    영지 역을 맡은 김새벽 배우 또한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단 몇 장면만으로도 그 인물의 삶과 고뇌가 느껴지며, 은희에게 건네는 짧은 말 한마디가 긴 여운으로 남습니다. 이 외에도 가족 구성원과 친구들까지, 모든 캐릭터들이 현실감 있게 살아 숨 쉬며 영화에 생동감을 불어넣습니다.
    음악 또한 영화의 감정을 고조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잔잔한 피아노 선율과 전자음악이 교차하면서 은희의 내면을 따라 함께 흐르고, 어느 순간 관객의 감정선과 겹쳐지며 울컥하게 만듭니다. 음악은 과하지 않게, 그러나 결코 가볍지 않게 영화의 결을 완성합니다.

    다시 꺼내보고 싶은 마음의 조각

    벌새는 성장영화이면서 동시에 상실과 치유의 이야기입니다. 우리 모두는 한 번쯤 은희였고, 지금도 어딘가에서 은희로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이 영화는 시간이 흘러도 쉽게 잊히지 않습니다. 조용한 장면 하나하나가 마음속에 머물면서 문득문득 다시 떠오르게 되니까요. 2024년, 벌새를 다시 꺼내 보는 것은 우리 안의 작은 감정들을 다시 만나보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너무 크지 않아 외면했던 감정, 누군가에게 말하지 못했던 생각들, 그리고 어쩌면 이미 지나간 것 같은 나 자신과의 대화를 다시 시작해 보는 기회가 되어줄지도 모릅니다. 작은 존재들이 부딪히며 스스로를 알아가고, 세상을 이해해가는 과정 속에서 우리는 다시 사람에 대해, 삶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잔잔하지만 강력한 그 힘이 지금도 우리 마음 어딘가에서 울리고 있습니다.